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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 조광조 평전
1510년 29세 (5)
작성 : 2021년 08월 04일(수) 09:39 가+가-
이처럼 종종 초기에 무려 다섯 차례의 역모 사건이 고변되었으며, 이에 연루되어 적지 않은 인물들이 목숨을 잃었다. 문제는 그 사건들이 정말 역모를 꾀했는가를 확증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사건의 주모자 또한 유생에서 종친, 정국공신들까지 그야말로 다양했다. 준종의 반정이 아직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가 제 2의 반정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만큼, 중종의 왕권은 불안했다. 그뿐인가. 반정이 떠안고 있는 도덕적인 결함들 또한 역모 사건의 제기로 작용했다. 조광조의 이름이 연루된 김공저 사건만 해도 무오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의 총신 유자광의 여전히 주종반적의 공신으로 봉해져 부귀를 누리고 있는 데 대한 항변이었다. 그런 자를 처단하지 않다니, 그것이 어찌 바른 것으로 돌아간다는 반정의 뜻이겠는가. 결구 이런 목소리들이 불거진 뒤에야 유자광이 유배를 처해지게 되었고, 이로써 예 사화의 진짜 죄인들이 그 죄를 받고 당시의 ‘죄인’들은 죄인이 아니었음이 거듭 확인됬어다. 중종 5년까지의 상황은 이런 정도였다. 조선은 아직 정치적인 안정을 찾지 못한 상태였으며, 중종은 이제 겨우 임금으로서의 소리를 조금씩 내려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들 사이, 중종 4년(1509년)에 공식 실목인 <연산군일기>가 완성되었다. 지난 시대에 대한 당대의 입장이 대략 정리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한 장이 이렇게 채워졌으니 이제 다음 장이 팔요한 때였다. 조광조의 생각도 그랬으리라, 다음 장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런데 이 무렵 조광조의 행보에 좀 의아한 면이 있다. 그는 왜 진사시로 등장했을까, 진사시는 사장詞章, 즉 ‘문장이 어떠한지’를 보겠다는 시험이다. 스승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조광조의 생각하는 ‘학문’은 경학經學이었지 사장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경전을 열심히 공부해야지 시문 짓기 따위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조광조와 함께 공부하던 이들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았다. 혹시 시문에 재능이 없는 게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런 의혹의 눈길과 비웃는 소리도 없지 않았다. 경학이 우선인가, 사장이 중요한가, 이는 과거 시험에서도 오래도록 시비가 이어져온 문제로, 그러니까 철학과 문학이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해온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는 당연히 학문이라면 철학이지, 라고 말하더니 불쑥 문학 시험에 응시해서 가볍게 장원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춘부>는 성리학 이론을 부로 읇어낸, 그러니까 철학적인 성찰을 문학의 형식 속에 잘 담아냈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다. 장원으로 뽑힌 것을 보면 당시의 평가도 그랬던 것 같다. 연보에 따르면 “시험관들이 놀라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과장을 감안한다고 해도 근거없는 상찬은 아니다.
표민경 기자 기사 더보기

hoahn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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