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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년 29세(3)
작성 : 2021년 06월 09일(수) 13:38 가+가-
결국 그는 긍정적인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자신이 따르는 학문 또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선함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 학문의 가르침을 세상으로 여는 것이 배운 자의 몫이다. 그것이 도학道學의 존재 의미가 아닌가.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 흐트러진 세상을 바로 세우는 것. 인간도, 세상도 그렇게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 믿고자 했다. 무릇 일이란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니, 인간다움은 그 마음만 올바로 지켜나가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강조하던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마음을 향한 다짐이기도 했으리라.

조광조가 진사시에 응시한 것은 중종 재위 5년(1510년) 봄이었다. 스물아홉. 봄도 지쳐 꽃마저 시들해질 무렵, 계절이 바뀔 만한 나이였다. 게다가 조숙한 천재라 할 만한 조광조가 아닌가. 그의 봄맞이는 너무 늦어 보인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중종반정이 일어났으니 연산군 시대를 피했던 인물들이 이미 출사를 결심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는 아직 공부가 덜 된 까닭이라 하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핑계처럼 들린다. 이미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출사에 아예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스승인 김굉필의 삶이나 가르침을 보아도 그렇고, 공부 자체를 몹시 좋아했던 조광조의 성향을 고려해볼 때도 평생을 포의布衣로 학문 속에 파묻힐 수도 있었겠다 싶다. 수기修己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꽤 어울려 보인다. 고고한 멋이 제격이었으리라. 한양에 세거해온 명문가 출신에, 젊은 시절부터 독특한 학문으로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제는 신원되어 그 학행學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김굉필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따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포의로 산다 해도 크게 아쉬운 것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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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ahn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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