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가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변할 수밖에 없다. 바쁜 일정으로 20여 년 동안 깊은 산골 고향마을에 가지 못했더니, 모처럼 아내가 성큼 동의하여 고향을 찾았다. 마을에는 특별이 가까이하는 분이 없어서 가지고 온 김밥을 먹고, 잠깐 시간을 내어 아내와 높고 깊은 산행에 나섰다. 진입로 길을 따라 마을 뒷산으로 오른 후 또 얼마간 계곡 쪽으로 내려갔는데, 아내가 왼쪽 샛길을 가리키며 '이리 가면 어디가 나오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늘 안 가 본 길을 궁금해 하고 나는 늘 가던 길로만 다니는 습관이 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하여 그럼 가 보자고 했다. 무성한 밤나무 뒤로 난 길을 따라 얼마만큼 내려가도 방금 지나온 길이 저 아래 보였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한참을 또 올라가자 한 초라한 집 지붕이 나타났다. 대문은 제주 정낭(나무 3개를 걸쳐 놓은 대문)처럼 굵직한 나무 기둥 하나를 걸쳐 놓은 게 다였다. 대문 바로 옆에는 판자를 이어 붙인 낡은 움막집이 있었고, 마당 건너편에는 조그마한 토담집이 있었다. 그리고 마당 좌우편에는 두 개의 무덤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사람이 오래전부터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슬쩍 쳐다보고 지나가려는데 두 무덤 옆 토담 벽에 걸어 놓은 글이 호기심이 일어 다가가 보았다.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이 판자에 적혀 붙어 있었다.

“아버지 그리운 날 / 감자꽃 핀다 //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 허기진 유년의 가난 속으로 / 눈물로 피는 하얀 감자꽃 // 피난 가다 죽은 형과 / 정신 나가 죽은 / 누이를 가슴에 묻고 / 말없이 감자를 심으시던 아버지 // 그때 소리 없이 흘리시던 눈물을 먹고 / 씨알은 점점 굵어가고 / 그 감자를 먹으며 우린 / 가난의 강을 건넜다 // 지금도 아버지 그리운 날/ 추적추적 비 내리고 / 하늘 위로 흐드러지는 / 하얀 감자꽃”

나는 이날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원시는 이동호의 ‘감자꽃’ 이었다. 원시의 ‘어머니’가 '아버지'로 바뀌었고, '서울 간 누이와 집 나간 후 소식 없는 형을 가슴에 묻고'는 피난가다 죽은 형과 정신 나가 죽은 누이를 가슴에 묻고'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 무덤은 글쓴이의 부친인 것 같고, 개작한 시구는 그 아버지의 삶의 일부를 담고 있는 듯했다. 마당 왼쪽에 있는 풀이 무성한 무덤 옆에는 명천 이문구(1941~2003)의 소설 <산 너머 남촌>에서 인용한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낳아서 초야에 풀처럼 살고 / 죽어서 숲속에 풀 거름이 되었다 /
지는 해 뜨는 달은 만년을 가는데 / 싹 나자 시드니 한세상 초로구나 / 사람들아, 무덤에 풀 베지 말라 / 인간사 덧없음을 여기서 알리라“

아까 그 무덤이 아버지의 무덤이라면, 이 무덤은 글쓴이의 것일까? 여기서 홀로 살다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은 것일까? 특히 '무덤에 풀 베지 말아라'는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해와 달은 만년을 가는데, 사람은 죽어 진토 되어 흩어지니 무덤의 풀은 베어 무엇 하겠는가?

곁에서 함께 글을 읽던 아내도 그래그래... 하면서 말을 아끼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토담집 창문으로 내부를 조심스럽게 이마를 대고 안을 들여다보니 간이침대엔 낡은 살림살이가 다소 있었으나 사용한 흔적은 없었다.

부처의 삼법인(三法印) 중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이 있다. '제행이란 '세상 모든 것'을 의미하고, ‘무상’은 항상 함이 없다는 뜻이다.

즉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성주괴공(成住壞空) 즉 생성되고, 존재하고, 무너지고, 없어지고 생각 또한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다. 즉 생겨나고, 작용하고, 변화하고, 소멸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도 생로병사 한다.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가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많은 연인이나 부부가 변해 버린 사랑 때문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은 제행무상을 잊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 또한 죽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패의 태양도 수명이 있다. 보통 '인생무상을 삶이 허무하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그러나 본래 의미는 '인생은 항상 같지 않고 덧없다'는 뜻이다.

옛말에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청춘도 영원히 머물지 않고 곧 쇠한다는 뜻이다. 정비석( 1911~1991)은 금강산에서 마의태자의 무덤을 보면서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을 다투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암연히 수수롭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어떤 부자가 풍년이 들어 곳간을 가득 채우고도 곡식이 남아 고민하던 농부 중에 유산으로 ‘더 큰 곳간을 지어 쌓아 두고 편안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말한 농부에게 전한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모은 재산이 다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이 부자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물을 얻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이 어리석은 부자가 죽음 이후를 전혀 대비하지 않은 데 있다 할 것이다.

올해도 마지막 달이 되었다. 우리가 매년 맞이하는 연말은 우리 인생에도 종착역이 있음을 매번 일러 준다. 한 해 동안 소망하고 집착했던 것들이 과연 영원한 생의 가치가 있던 것들이었는지 생각하고 뒤돌아보자.(201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