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길이 나지는 않았다. 평평한 곳은 자주 다니고 좁고 불편한 곳은 넓히고 편하게 만들어갔다. 사람들은 길을 다니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인연을 맺고 문화를 만들며 지역을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렸다. 길을 다니며 새 소식과 사상을 전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사람들이 길을 드나들며, 그렇게 역사는 쌓여갔다. 산과 언덕에 가로막히면 넘나들며 고갯길을 만들었다. 그런 고갯길 가운데 하나가 광주와 화순을 잇는 너릿재(板峙)이다. 고갯길에는 저마다의 사연들이 많고 너릿재도 미처 이루지 못한 꿈들을 품고 있다.

1894년 농민들은 이미 썩어버린 정부와 욕심으로 가득 찬 관리들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낫과 죽창을 들었다. 동학 농민들은 꿈을 이루는 듯 했으나 일본과 부패한 정부의 탄압으로 그 뜻은 꺾이었다. 집강소(執綱所)를 만들어 농민들이 바라던 세상을 잠깐 맛보았으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뒤 처형된 동학 농민군들의 시신들을 넣은 ‘널(板)’을 날랐던 것으로부터 너릿재(板峙)의 이름이 생겼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이름의 유래부터 남달랐듯이 너릿재는 민중들의 이루지 못한 꿈과 슬픈 역사를 품고 있다.

1907년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화순에서 행사(杏史) 양회일(梁會一)이 의롭게 일어났다. 그는 주변과 연락해 쌍산의소(雙山義所)를 만들고 의병들과 함께 능주와 화순 등지의 관공서 및 일본인 상가 등을 공격했다. 광주로 진격할 것을 계획했으나 날이 저물어 끝내 너릿재를 넘지 못하고 모후산으로 길을 돌렸다. 뒤따라 온 일본군의 공격으로 끝내 의병들은 너릿재를 넘지 못하고 항일구국의 꿈은 무너졌다. 일본군에 잡힌 양회일은 풀려났으나 다시 붙잡혀 장흥헌병대에서 순국했다.

앞선 세대의 이루지 못한 꿈은 해방 뒤로도 이어졌다. 해방과 함께 온 민족분단, 미군의 통치는 광복의 기쁨을 앗아갔다. 미군정은 친일파를 다시 뽑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이어갔다. 해방된 조국에서 화순탄광의 노동자들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나 그리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미군정은 나라의 기간 산업인 탄광을 접수하고 노동자들은 다시 전과 같아졌다.

광복이 됐으나 자주독립은 멀리 있고, 분단의 생채기는 깊어가며 노동자들은 먹을 쌀조차 없었다. 1946년 8월 15일 화순탄광의 노동자들은 너릿재를 넘어 광주에서 열린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노동자들은 쌀과 완전한 독립을 달라고 시위했다. 미군정은 경찰과 미군, 비행기와 탱크를 앞세워 노동자들을 광주에서 너릿재까지 몰아간 뒤 칼로 찌르고 총질했다. 그 뒤 미군정은 노동자들을 억누르며 일시 광산의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총칼에 맞아 죽거나 다치고, 새 세상을 바라던 노동자들의 꿈은 그렇게 무너져갔다. 수십 년 뒤 한 시인은 이들의 슬픔을 노래한 죄로 감옥에 갇혀야 했다. 그렇게 너릿재의 아픔은 또 다시 역사의 한 조각으로 쌓여갔다.

1980년 5월 광주는 삶과 죽음이 엇갈린 곳이었다. 군인들은 국민들을 짐승처럼 대하고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 시민들은 살고자 총을 찾아 너릿재 터널을 넘나들었다. 5월 22일부터 광주를 빠져나가는 모든 길목을 군인들이 막아서고 시민들은 광주의 비극을 널리 알리려 했다. 1971년부터 터널이 뚫린 뒤 너릿재는 더 이상 고개가 아니었고 시민들은 차를 타고 넘나들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너릿재는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군인들의 총격으로 그날 버스는 더 이상 너릿재를 넘지 못했다. 광주의 참상을 알리려던 시민들의 꿈은 너릿재 부근에서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너릿재를 막은 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을 ‘비적’(匪賊), ‘폭도’(暴徒)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신을 묻고 그들의 꿈을 함께 무너뜨렸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던 사람들의 꿈은 그렇게 파묻혀졌다. 그들이 끝내 너릿재를 넘지 못했던 것처럼.

얼마 전 5·18기념재단이 ‘5·18 암매장지’를 찾으려고 너릿재 터널 부근을 발굴했으나 실패했다. 터널을 막고 도로를 파냈음에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 덮어졌다. 아무 것도 찾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37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한 것이 슬프다. 마치 너릿재를 넘지 못한 아픈 역사 속에서 쓰러진 사람들의 무너진 꿈, 못다 부른 슬픈 노래 같아서.

*노영기 교수 프로필
-조선대학교 사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碩･博士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선임 연구원
-서울대, 성균관대, 충남대 , 조선대, 강사 역임
現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