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이 가기 전에

허영자

섣달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국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 눈은 내려라
섣달그믐이 가기 전에


섣달 그믐날의 ‘섣달’은 한 해를 다 보내면서 새해의 설을 맞이하기 위한 서웃달(설윗달)의 준말이고, ‘그믐’은 만월의 보름달을 뜻하며 날마다 줄어들어 눈썹같이 가늘게 되다가 이윽고 모두 소진하여 없어진다는 순 우리말 ‘그믈다’의 명사형이다.

참으로 갈 것 같지 않은 다사다난했던 날들이 어느새 다 지나가고 갑오(甲午)년도 끝자락에 서 있다

섣달 그믐이 다가오면 지난 새해를 맞이할 때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겨 보고, 주어진 삶의 명제 앞에서 나는 지금 누구이며 어떠한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반추하게 된다.

이제는 한 해의 삶을 성찰하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눈 밭에 맨몸으로 서 있는 산과 들, 나무와 풀처럼 치열하게 우리 인간들도 명상에 잠겨야 할 시간이다.

*허영자(許英子, 1938년 8월 31일 ~ )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전직 대학교수. 경남 함양에서 출생, 경기여고와 숙명여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노천명 연구>로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성신여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