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의 옛 동복현 사평촌(지금의 사평면 사평리)에 이런 명승이 있었다. 봉정산 자락 사평천이 흐르는 물가에 자리한 원림이었다. 그 주인은 주변의 산수와 수석들까지 망라하여, 이곳 50개가량의 다양한 경관에 제각기 그 색깔과 모양에 알맞는 이름을 붙였다. 누정은 물론 산, 언덕, 바위, 골짜기, 길, 못, 섬, 물가, 보, 둑, 다리, 샘 등이 모두 그 대상이었다. 누정만 하여도 모두 13개소나 되었는데, 취벽루, 몽각정, 청뢰정, 미원정, 소학정, 고창정, 백화정, 주한정, 임예정, 고죽정, 용약정, 양신정, 유옥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렇게 규모가 크고 잘 갖추어진 아름다운 원림이었기에, 당시 남쪽에 이름난 원림과 누정이 많았지만 모두 여기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 원림이 바로 고반원(考槃園)이다. 고반이라는 호를 가진 남언기(南彦紀)가 16세기 후반에 구축하였다. 고반원의 주인 남언기는 원래 한양 태생(1534)이었는데, 부친인 남치욱이 1540년대에 보성군수와 장흥부사를 지낸 일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장성의 김인후 문하에서 정철 등과 함께 수학한 바도 있다. 35세 때인 선조1년(1568)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세상사를 멀리하고 고반원을 조영하였다고 하였으니, 고반원 창축은 1570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장인이었던 설홍윤을 따라 의지하여 이곳에 복축하였다. 글씨에 조예가 깊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음악을 좋아하여 한양길에 오를 때에도 거문고와 피리를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재주를 숨기고 초야에 묻힌 ‘일민(逸民)’과 같은, 이런 그의 행적에 울림이 있어서였을까? 조선 후기의 저명한 학자 이익과 성해응이 <고반남선생소전>과 <일민전>을 통해 그의 삶을 집약하여 오늘에 전해주고 있다.

짧은 글의 서설이 길었다. 이제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남언기는 고반원을 조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사는 즐거움과 느끼는 아름다움을 노래로 남겼다. 가사문학 작품인 <고반원가>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전체 7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양에서 사평촌 고반원으로의 귀원을 말한 서사를 비롯하여, 고반원의 하루 일과, 사시 경물, 주변 산세, 수변 풍경, 산곡 풍치를 거쳐, 마지막 결사에 이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작품 전체가 온전하게 남아있지 못하고, 마지막 결사 부분이 결락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은 제4단의 고반원 주변 산세를 그린 부분이다. 450년가량이 지난 지금도 친숙하게 사용되는 산 이름들이 반갑다.

대월봉 소월봉 나란히 단정하고
구봉산 백년암 고루고루 벌였구나
천운 용암 옹성 마수 모후 무등 연화 취병은
어찌한 일로 구름 위에 솟아나서
다투어서 엿보고
눈썹 같은 도리뫼는 어디로 가다가
들 가운데 서 있는가

16세기에는 고반원 외에도, 무등산권에 소쇄원, 면앙정, 환벽당, 식영정, 물염정, 송강정 등 많은 누정이 건립되었다. 아울러 이곳에서 송순의 <면앙정가>와 정철의 <성산별곡>이라는 가사 작품이 창작되며, 한국문학사에 누정은일가사라는 새로운 유형이 형성되었다. 남언기의 <고반원가> 역시 이들과 비견되는, 시대와 지역과 유형을 공유하는 작품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반원의 영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언제인가 주인 남언기가 세상을 떠났고, 고반원도 임진왜란의 병화를 만나 전소되고 말았다. 조성된 지 채 3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 한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7세기 후반 옛 주인의 외증손 이만석에 의해 겨우 유옥정 하나가 중건되었다. 그리고 또 한참이 흘러, 19세기 후반(1862) 민주현이 그 옛터에 임대정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러는 사이 남언기도, 고반원도, <고반원가>도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이렇게 잊혀졌던 고반원과 <고반원가>가 다시 소환된 것은 수년 전 남언기의 유고 󰡔고반선생유편󰡕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고반원명명기>를 통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고반원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고반원가>의 존재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례이다.

지난 2012년에는 민주현의 임대정원림이 국가문화재인 명승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문화유산을 찾는 탐방객들은 단순히 좋은 경관의 눈요기만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 이면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경관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반원과 <고반원가>는 임대정원림에 보다 풍부한 스토리를 제공해 주는 원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