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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수기 - 거제도 포로수용소(3)
작성 : 2019년 11월 22일(금) 18:44 가+가-

故 김중섭 선생

나도 그런 신세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현장에 있지 않아서 보지 못한 일이지만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한 사건이 벌어진 곳도 내가 수용되어 있던 62수용소였다.

나중에 발견된 것이지만 62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대장간까지 만들어 놓고 수백 개의 창을 제작했을 정도였다.

포로수용소 대장이 포로들한테 납치가 되자 삽시간에 미군 헌병과 한국 헌병들이 수백 명씩 몰려와 수용소는 한때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헌병수용소와 같았다.

이 후 강화된 경비와 함께 파견 초소가 늘어났다.

하루는 새로 생겨난 파견 초소 근방엘 가 보았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천막이 하나 있었다.

교인들을 수용하는 천막이었다.

대위 계급장을 단 미군이 책임자였다. 나는 이 지옥 같은 곳, 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62수용소를 탈출하기 위하여 꾀를 내었다.
“헬로우 캡틴! 아임 크리스챤 써~.”

나는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 교인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이런 현장을 공산당들한테 들키면 당장에 끌려가 죽을 짓이었지만 다행히 나의 행동은 공산당 포로들한테는 들키지 않았고, 거짓 예수쟁이 행동을 인정해 준 그 대위의 도움으로 생지옥에서 구출되어 교인 천막으로 이동했다. 천막안에는 약 20여 명의 다른 포로들이 있었다.
대개는 이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3일 만에 65수용소로 이송되었다.

65수용소는 62수용소와 달리 철저한 우익 포로수용소였다.
명령 계통이 추상같았다.
65수용소 오던 날 그 추상같은 분위기가 내게 엄습했다.

“너 빨갱이 간첩이지?”

“아닙니다.”

“뭐라고? 이 자식 봐라!”

무조건 간첩이라고 두들겨 패는 것이 심사의 첫 단계였다.

어찌나 맞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기구한 운명이여!
아, 기구한 나라여!
아, 기구한 민족이여!



“몇 달 만인가?”

거짓을 부려 잠입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겠지만 나는 북에 있을 때도 무조건 맞아야 하는 일을 당하였고, 이남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이런 일을 달하였다.

빨갱이가 아닌 사람을 빨갱이라고 패고,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이라고 패니, 맞아 죽어도 인정을 받을 때까지 얻어 맞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심증이 갔는지 소대에 배치했다.

전시에 군인은 할 일이 많지만 잡일과 궂은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이 맞겨지지 않았다.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은 65포로수용소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맡겨진 일은 똥통을 메고 십리 밖의 바다에 나가 버리는 일이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그 지독한 냄새가 나는 변소에 가서 인분을 드럼통에 퍼넣고 돌개바람에 시달리며 그 먼 곳까지 메고 가서 해변에 버리는 일은, 실로 대학을 다니던 지성인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으나, 운명처럼 내 어깨에 메워진 똥통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작업을 독촉하며 감시하는 헌병들의 눈초리는 모질고도 모질었다.

내가 인민군들이 득실대는 수용소에서 우익이 있는 65수용소로 온 것은 순전히 가짜 예수쟁이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으므로 교인 행각은 계속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교인이 아니라는 것이 탄로나면 그 때는 진짜 간첩으로 몰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생명은 그날로 끝장이었다.

옥 목사라는 분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한 달 후 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이 제일 좋다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상으로 주었다.

그런 다음 중대본부에서 교육을 담당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초등학교 5, 6학년 과장의 사회와 과학 그리고 국어 교육이었다.
기자 hoahn01@hanmail.net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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