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중섭
1925년 9월14일생/ 1938년 봉화공립소학교 졸업 / 1939년 중동학교 입학/ 1946년 성균관대학교 상과 입학
10월 22일경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총 한번 쏘아보지 않고 훈련만 한 나를 우등 사수로 뽑아 소련제 장총을 지급했다. 유효 사거리(射距離)가 3천 미터나 되는 세계에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총이라고 했다. 장총을 내게 지급한 이유가 있었다. 가다가 위험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먼 데까지 사격을 하란 것이었다. 그 외에 쌀 두 되와 탄알 200발, 그리고 수류탄 2개도 지급했다.
행군을 하여 시내에 있는 부대 본부에 갔다. 부대 점검이 끝난 다음에 또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가을비가 억수같이 내려서 길은 한없이 질퍽했고, 도처에 물이 고여 웅덩이 천지였다.
군인들은 양말이 없었다. 그들은 양말 대신 무명 두어 자로 된 발싸개라는 것을 지급하였고, 그것으로 발을 싼 다음 천으로 만든 군화를 신으면 행군 준비는 끝이었다.
질펀한 길을 걷자니 행군을 시작하지 마자 군화에 물이 스며들어 발바닥에서는 찌걱찌걱 소리가 절로 났다.
시내 근처 야산 어느 굴 속에서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자고 23일경 진남포를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진행을 계속했다. 그들은 북에 있는 신안주에 인민군을 집결시킨다고 설명했다.
어디쯤 갔을까, 멀리 바다속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에 일장기(日帳旗)가 펄럭였다. 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해방된 조국에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일장기가 아니라 태극기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이 태극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포항까지 해방을 시켰다는데 진남포 앞 바다에 태극기가 펄럭일 수가 있을까? 그 후 낮에는 산에 숨어 있다가 어둠이 깔리면 행군을 시작했다.
가다가 보면 앞에서 신호탄이 오르고 이어서 뒤에서도 신호탄이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공중에서 전투기가 나타나 그 신호탄 중간에 수없이 지상으로 사격을 하고 갔다. 거기에도 우익의 빨치산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익 빨치산들이 앞뒤에서 신호를 해주고, 이 신호에 따라 전투기들이 득달같이 나타나 행진을 하고있는 인민군부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야간 공습이 있으면 행군 대열을 산과 들로 흩어졌다가 공습이 끝난 다음에 다시 국도에 올라왔다. 공습 후 국도에는 시체로 변한 인민군과 부상을 당한 인민군이 길바닥에 수두룩하게 깔려 있었다.
국도에서는 줄을 서지 않고 자유롭게 건너갔다. 우리 네 사람을 생사의 기로에 서서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며 먹지도 못하고 계속 부대를 따라 북으로 갔다. 어떤 때는 길가에 있는 집에 들어가 누룽지를 얻어다가 나누어 먹기도 하고, 전시라서 먹을 것이 없는 집이면 물 한 바가지를 얻어먹고 행군을 계속했다.
하루는 깊은 산의 높은 고개를 넘게 되었다. 구렁텅이에 무엇인가 하얀 물체들이 보였다. 3, 40 구에 가까운 시체들이었다. 그런 시체 더미를 고개를 넘으면서 두 곳이나 보았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좌익들이 후퇴하면서 반동으로 몰린 민간인들을 산속에서 죽이고 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전투로 죽은 사람보다 보복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25일 세 시경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천(漢川)이었다.
화순군민신문 기자 hoahn01@hanmail.net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