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는 대인국에 가 머무를 때 작은 노리갯감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소인국에 체류하는 동안은 그 큰 거구로 융숭한 대접 받으며 정말 사는 것 같은 인생의 단맛을 보고 살았단다. 오래전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걸리버는 “소인국에서의 생활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보람 있고, 잊지 못할 시기였다.”라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내게 했다.
나는 그냥 씩 웃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소인국의 왕이 되어 살고 있다.
20년째 나는 그저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가꾸고, 다듬고, 사랑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아내가 다가와 “와! 영락없는 소인국이네요. 거기 서 있는 당신은 왕이고요.”라는 말을 했고 그날부터 나는 소사 분재 400여 개가 자라고 있는 소사나무 분재 나라 소인국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더욱 열심히 400여 내 백성들을 사랑으로 쓰다듬고 손질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중년에 한 친구가 내게 선물한 소사 분재 하나, 소품이었는데 봄에 연두색 새싹이 돋고, 여름엔 무성한 초록이 보기 좋았으며, 가을에는 은은한 단풍이 들어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 잎이 다 진 겨울에는 가느다란 가지들의 자연스러운 배치가 나를 소사 사랑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다수의 어린 소사 묘목을 구해 고향집에 심었고 20년 만에 소인국을 완성하고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왕 노릇이 어디 만만하고 쉬운가?
우리나라 근래의 역사를 보면 총칼을 휘두르거나 자기 편 만 잘 주무르면 왕은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물러난 뒤 반드시 감옥에 갔거나 가야만 했고 다른 왕들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꼭 태클을 거는 족속들 때문에 발 한 번 제대로 뻗고 잠을 자지 못했지 않은가. 지금의 왕은 어떤가? 잘 해보려 무한히 애를 쓰는데도 이상헌 것들이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아무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돌아가신 쩌어번 왕께서는 “하이고 나 왕 못해 묵겄다.”고 했었던갑다. 더군다나 요새같이 00놈들이 사는 옆 나라 두목이 얌전히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어쩌네 저쩌네 하고 건들어싸니 우리 왕님은 더 힘들기만 하다. 그래도 우리 국민들이 ‘다 깐 쬐깐한 것들!’하며 똘똘 뭉쳐서 대항해 싸우니 우리 왕님도 힘이 나실 것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말이 왕이지 내 백성들 사이에서 호시탐탐 세력을 키우고 내 백성들을 향해 ‘너 죽고 나 살자.’며 기회만 노리는 잡초 군단들, 우리 왕국의 무서운 적이다. 참으로 징그럽다. 얼마나 징허면 나훈아가 ‘잡초’라는 노래까지 불렀을까. 3월부터 자고 새면 매일 쑥쑥 자라면서 “어디 소사 너희들하고 우리하고 힘겨루기 한 번 해보자.”라고 악을 쓰며 몸을 늘인다. 그러나 내 백성 소사들은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으니 어쩌랴? 나는 삼 철 내내 그 풀들을 매느라 팔, 다리, 허리가 편안할 날이 없다. 그러면서 육칠월엔 소사 겉모양 다듬기를 하는데, 분재용 이발기계로 날마다 새벽이면 한두 시간씩 다듬어 준다. 하루에 고작 여남은 개, 두 달이 다 가야 내 백성들은 제 모습을 갖춘다. 땅기운을 받고 서 있으니 오지게도 잘 자라는 가지들, 하늘로, 옆으로 무섭게 뻗어난다. 잠시만 방치하면 내 백성들은 서로 엉켜서 모두 못난이로 변신해 버린다. 따라서 제때에 잘 다듬어주어야 한다. 낙엽이 진 후 11월부터 겨울 4개월간은 왕인 나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실력을 발휘하는 때다. 내 백성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하루 대여섯 그루씩 숫제 예술품을 조각하듯 섬세한 전정을 한다.
왕년 미술교사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때다.

원래, 분재란 자연스럽게 자라고 싶은 나무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하고 목을 자르고, 팔과 다리를 비틀고 구부려서 보기 좋은 불구 나무를 만드는 것인 바 나도 그 흉내를 내며 내 백성들을 괴롭히고는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내 백성들은 비명을 지르며 제발 그대로 좀 두어달라고 조르지만 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괴팍한 심보로 백성들의 외마디를 무시하고 소인국을 힘으로 다스린다. 이건 내가 중년일 적에 어느 못된 왕에게서 배운 포악한 통치방법이다.

그러고 나서 4월이 되면 우와! 멋지게 다듬어진 가지들마다 돋아나는 연두색 새싹, 정말 환상 그 자체다. 이걸 보는 재미로 그 추운 겨울 동안 남들 신나게 놀고 즐길 때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내 백성들을 어루만졌나 보다. 이어서 여름의 무성한 초록나라, 수많은 자잘한 녹색 잎들이 빽빽하게 어울려 반짝거리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그리고 가을의 은은한 단풍 잔치를 마치고 겨울 잔가지들의 어울림 향연까지 나는 내 폭정에 반항 한 번 못해보고 숨죽이고 있는 백성들을 보며 잔인한 미소를 만끽하고 산다.

아! 사랑하는 나의 백성들아!
너희들 쓰다듬느라 내 몸은 무척이나 힘이 들지만 너희가 예쁜 모습으로 자라서 나라 전체가 아름다우니 이 왕의 마음만은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다. 이웃나라에서 아무리 잡초 군단이 쳐들어와 괴롭혀도, 작렬하는 태양과 모진 비바람에 힘겨워도 이 왕과 함께 끝까지 이겨내고 더욱 아름다운 나라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