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존재 좀머 씨. 그 좀머 씨와는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한 소년 ‘나’, 전혀 어울리지 않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잘 엮어낸 작품. ‘나’가 성장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예쁘게 스케치한 듯한 동화 그러나 동화 같지 않게 삶이란 또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좀머 씨 이야기』이다.

살아있던 매순간 무수한 발자국을 찍고 다녔지만 죽을 때는 정작 흔적 없이 사라져간 좀머 씨라는 존재를 통해 삶이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 유년시절의 ‘나’는 날 수 있다고 믿는다. 단지 날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다시 땅에 내려앉을지 몰라서이다. 늘 나무 위에서 숙제하고 잠을 자고 상상하며 지내는 나에게 그곳은 아무에게도 어떤 것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해방공간 아지트다.

그리고 나의 집과 불과 2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이웃마을에 좀머 씨가 살고 있다. 좀머 씨는 1년 내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걸어 다닌다. 좀머 씨가 왜 이렇게 걷고만 있는지 걸어야 하는지 이 책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어떤 트라우마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된 행동일 거라는 주변 인물들의 추측성 언급뿐이다.

어느 날, 나는 아빠와 함께 경마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엄청난 폭우로 옴짝달싹을 못할 처지가 된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도 없게 쏟아 붓는 비, 차차 비가 우박으로 바뀌더니 주먹만큼 커져 우당탕탕 차를 부숴버릴 듯 공포스럽게 한다. 몹시도 사나운 그 순간에도 좀머 씨는 배낭을 메고 이상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걷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대사 같은 말을 혐오하며 절대 쓰지 않던 나의 아버지조차 “그러다가 당신 죽을지도 모르니 어서 차에 타시오”라고 좀머 씨를 걱정하며 소리친다. 그때, 좀머 씨가 우물우물 꺼낸 말이라는 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단말마 같은 외침이었다.

좀머 씨의 걷는 모습은 하나의 풍경이 되어버려 더 이상 사람들은 좀머 씨에게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조금 더 성장한 나는 자전거를 타고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니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게 어그러져 피아노 선생인 풍켈의 분노에 찬 협박을 받는다. 잘못도 없이 곤욕을 치른 나는 부당하고 불공평한 세상이 너무 싫어져 죽어버리기로 결심한다. 죽으려고 결심한 순간 가문비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던 좀머 씨의 한숨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담긴 좀머 씨의 한숨 소리를 듣고 나는 ‘나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깨닫고서 나무에서 내려오게 된다.

세월이 한참 흘러 나는 더 이상 나무를 타지 않게 되었고 자전거도 잘 타며, 쇼팽이나 베토벤 등의 곡을 칠 수 있게 된 어느 시점에 다시 한 번 좀머 씨를 보게 된다.

그날도 좀머 씨는 계속 걷고 있었는데 물속을 걷고 있었다. 그의 몸이 물속으로 점점 사라지더니 그의 모자만 물 위에 둥둥 떠 남았다. 나는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한다. 어린 시절 비가 심하게 많이 내리는 날 좀머 씨가 내뱉은 단 한 마디의 말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 때문이었다.

좀머 씨가 그토록 끊임없이 걷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좀머 씨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