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거제문화예술회관 김호일 관장의 부친인 김중섭(95년 작고) 선생의 생전 자서전에 적은 내용으로, 육이오 전쟁에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생활까지를 기록한 실제 경험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인민군에 끌려간 경험을 통해서 다소나마 전쟁의 불행과 평화의 가치를 짚어보고, 전쟁의 비극적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위하여 기고 한다.
글쓴이 / 김중섭
1925년 9월14일생/ 1938년 봉화공립소학교 졸업 / 1939년 중동학교 입학/ 1946년 성균관대학교 상과 입학
종매가 가고 저녁이 되었다. 아무래도 비상식량이 필요할 것 같아 오징어포 등 일부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걱정 속 26일 새벽을 맞았다.
대문을 열고 나가 건너편 대령 집을 쳐다보았다. 그 집은 벌써 집을 비우고 떠나고 없었다. 거리는 태풍전야와 같이 적막에 쌓인 가운데 먼 곳에서 쿵쿵 포 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낮 열한시쯤, 쾅! 소리와 함께 집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경동 고등학교 모퉁이에 박격포탄이 터졌다. 온 마을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삽시간에 뒤집혔다. 집집마다 서둘러 보따리를 싸고 피난길에 올랐다. 포탑 공격은 민가가 있는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거 안되겠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피난 보따리를 꾸렸다. 살림을 하면서 공부를 하려고 문전 옥답을 팔아 마련한 집을 비우고 떠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포탄은 코앞에 떨어지고, 별다른 대책이 없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비가 후드둑 후드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급한 대로 싼 짐을 지고 두 살 먹은 작은 아이는 아내가 업었다. 다섯 살 먹은 큰 아이는 손을 잡고 걸었다.
탑골 승방 산을 넘어 창신동 동덕여고를 거쳐 동대문으로 향했다. 종로 쪽은 벌써 사람이 다니지 못 할 만큼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그때 피난민 대열을 뚫고 군 차량 한 대가 지나면서 방송을 하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아군은 의정부를 탈환하고 북으로 진격 중입니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방송은 생판 거짓말이었다. 두세 시간 전에도 신설동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진격을 한다니...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난 군인들의 거리 방송을 믿지 않았다.
그 가까운 종로 5가에서 종로 4가까지 가는데 무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많은 인파 속에 어린 것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종로 4가쯤 가니 사람들이 웅성 거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한강 다리가 끊어졌다.”
그제서야 나는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강을 건너려고 용산 쪽으로 가던 인파와 되돌아오는 인파가 엉키고 설켜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오후 다섯 시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종로 4가 일대에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리가 없었다. 현재 동국대학교 입구에 있던 묵정동 고모님 댁으로 발길을 옮겼다.
종로 4가에서 묵정동까지는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중 동대 입구에서 국군 한 사람을 만났다.
“아저씨! 저기 남산에 국군이 있습니까? 아니면 인민군이 있습니까?”
전쟁이 났을 때에 전황을 알아보려면 민간인이 군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세상은 갑자기 거꾸로 되었다. 군인이 민간인에게 전황을 묻고 있는 판이었다. 지휘 계통이 무너진 폐주병이 허겁지겁하는 모습을 보며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어떻게 해서 나라의 꼴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화순군민신문 기자 hoahn01@hanmail.net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