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논을 가는 트랙터 소리들이 요란하다.
지팡이를 짚고 논밭을 오가는 허리가 굽은 노인들의 발걸음도 분주하기만 하다.
‘부지깽이도 한몫을 한다’는 바야흐로 한해 중 가장 바쁘다는 모내기철인 것이다.
쌀 수급문제 때문에 논에다 다른 작물을 심으라는 행정당국의 권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부분의 농가들은 끄떡도 하지 않고 변함없이 모내기 준비들을 하고 있다.
내가 사는 마을도 70~80대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농사짓는 가구도 10여 가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모내기철이라고 들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 반갑기조차 하다.
간혹 휴일이라고 도시에 있는 자녀나 친척들이 농사일을 거들러 와서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흐뭇함을 넘어 모처럼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덩달아 즐겁기까지 하다.

하지만 논둑풀을 베고, 논을 갈고, 모판을 나르면서도 신명이 나지 않고 속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다. 요즈음도 산지 쌀값이 떨어지고 있다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걸 보면, 정부든 지자체든 주곡인 쌀을 제대로 대접할 생각은 어쨌든 없는 듯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에 대한 우리 농민들의 집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주식이고, 그래서 쌀밥을 못 먹는 것은 굶는 거나 다름없이 여겼던 것이 우리 조상들이었다. 우리 민족을 ‘반만년 농경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반만년 동안 쌀농사를 지어온 민족이라는 이야기에 다름이 아니다. 만주든, 시베리아든, 심지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크스탄 등 중앙아시아든,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물이 있는 곳이면 논을 만들고 쌀농사를 지었고, 그래서 우리 민족이 쌀농사에 있어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농사철이 아닌 겨울철 사랑방에 앉아서도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쌀농사인 것을 보면 일 년 내내 쌀농사 어떻게 잘 지을까만 궁리하고 있는 것이 우리 농민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만큼, 대기를 정화하고 경관을 보존하는 기능, 수자원을 유지하는 역할 등등의 쌀농사의 공익성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쌀은 우리의 역사이고, 혼이고, 문화고,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농사하면 쌀이고, 쌀이 곧 농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란 이야기는 고사하고, 지금은 하루 먹는 쌀값이 커피 한 잔 값이 안 된다는 소리는 이제 더 하기도 입이 아픈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쌀이 없으면 라면 먹지!’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우스개가 되고, ‘농업인의 날’ 아침부터 텔레비전에서 ‘빼빼로데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서글픈 현실이다. 공영방송인 KBS가 몇 년째 매주 일요일이면 커피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커피의 역사에서부터 커피의 종류, 심지어 커피를 맛있게, 우아하게 먹는 방법까지 온갖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쌀값이 올랐다는, 그래서 물가가 걱정이라는 따위 이외에 주곡인 쌀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거의 들어본 일이 없는 것이 비단 나 혼자뿐일까? 이런 방송 내용들이 이른바 요즈음 대세(?)라고 하는 커피라는 식품을 둘러싼 상업주의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것이네 하는 비판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공영방송이라면 일주일은 놔두고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우리의 주곡인 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어쨌든 식량자급률이 20%대 초반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힘들여 쌀농사를 짓는 고령의 농민들 이야기와 도시의 소비자들이 관심 많은 안전한 먹거리와의 상관성을 이야기하는 어떤 신문도, 방송도 없다. 요즈음처럼 인문학이 풍년인 시대에 쌀을 주제로 토론하는 모임도 단체도 찾기 어렵고,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이나 ‘통일농업’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이야기하는 학자는 더더욱 드물다. 실은 한국사회가 ‘농업적 삶의 가치’를 포기하면서부터 지금처럼 비인간적이고 복잡한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전체 인구의 5%도 안 되고, 그 중에 청년농업인이 1% 미만이라는 이야기는 우리 농업과 쌀이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분명한 경고음이다.
이 대목에서,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신명은 고사하고, 앞으로 우리 농업과 농촌을 어떻게 할 것인지, 농촌에는 별장이나 하나씩 지어놓고, 골프장이나 여기저기 만들어놓고 모든 국민이 아예 도시로 몰려나가 살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우리 농업을 유지하고 농촌을 가꾸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토론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대통령이 경상도 어느 농촌마을에 찾아가서 이앙기를 몰며 모내기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대통령이 농업과 농촌을 챙기는 모습 같아 반가웠지만, 한 편으로는 그동안 그럴듯한 구호만 앞세웠지 농업과 농촌을 이 지경으로 망가뜨려온 역대 권력자들의 이미지가 떠올라 그것을 보는 심사가 별로 편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미지가 아닌, 정책의 진정성과 흔들림 없는 실천이 그래서 중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