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호흡했다. 아이들과의 소통 매체는 늘 진심어린 관심과 애정이 담긴 마음이었다. 다음이 좋은 책들이었다. 아이들의 근기(根氣)를 살핀 후 약간의 욕심이 나는 아이가 발견되면 좋은 책을 소개하고 읽도록 독려했다. 다양하고 많은 책들 중에서 아이들의 근기와 역사의식을 길러주는 책으로 『양철북』을 선정해 읽도록 권했다. 페이지가 700쪽이 넘다보니 완독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하지만 읽어낸 후 아이들이 맛보는 성취감 또한 그만큼 컸다.

『양철북』의 저자 귄터 그라스는 단치히 교외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카슈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라스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신의 가족에 대해 답답증을 느꼈고 소시민적 세계에 절망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 단치히를 무대로 어린 시절의 체험을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의 가족사를 통해 그대로 담고 있다. 그 점에서 『양철북』은 그라스의 자전적인 요소가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양철북』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189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인 1939년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그리고 있다. 제2부는 193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의 나치 시대와 전쟁을 다루고 있다. 제3부는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서독의 전후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양철북』은 이러한 시대사적 구성을 바탕으로 독일 소시민의 일상을 희화적으로 묘사한다.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충실히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의 회상을 통해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과 죄의식을 일깨우고, 전후 서독의 부조리한 모습들을 고통스럽게 들춰낸다. 이를 통해 『양철북』은 나치즘의 온상이 된 독일 소시민계층의 기회주의적 태도와 전후 서독의 극복되지 못한 과거, 사회적 모순 등을 파헤치고, 혼돈과 부조리의 역사과정을 그 자체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역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주인공 오스카가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는 양철북이 갖는 상징성이나 오스카의 양철북에 대한 집착도 시대사적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양철북은 우선 오스카의 자아를 대변하는 도구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거나 주변 세계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표현하고 싶을 때 북을 친다. 양철북은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나 소시민적 삶에 대한 개인적 거부를 나타내지만 점차 시대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양철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된 군국주의와 군사적 규율을 암시하게 되고, 독일 소시민 사회를 파고든 나치의 선동과 파괴를 암시하는 도구가 된다. 오스카가 맹목적으로 양철북에 집착하고, 오스카의 북소리에 맞춰 아이들이 줄지어 따라다니는 것은 독일 소시민들이 맹목적으로 나치 군국주의에 열광했던 역사적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

유리를 파괴하는 오스카의 괴성 또한 시대사적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는 그의 괴성이 순수한 자기방어의 수단이자 소시민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점차 공격성을 띄게 되면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나치 독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오스카가 북을 치며 괴성을 질러 유리를 깨뜨리는 행위는 계속되는 전쟁과 무차별적 파괴를 서슴지 않았던 나치 시대의 파괴성과 공격성의 가시적 상징이다. 오스카는 나치 독일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대사의 영역에서 저지르는 일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소시민의 세계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시대의식 없이 맹목적으로 나치의 선전을 쫓아 행동했던 소시민계층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나치의 등장과 만행을 가능하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다시 들춰보면서...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 어떠한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시대와 역사 앞에 바로 서야 할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