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는 나치과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동안 나치과거 문제는 독일의 정치, 사회, 문화적 담론을 통해서나 독일인들의 일상적 삶을 통해 끊임없이 현재화되어 왔지만,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문학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스러운 일이다.”라고 함축적으로 대변했듯이, 독일 문학계는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과거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1944년에 태어난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전후세대로서 부모세대가 저지른 죄에 대한 부채의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전후세대가 짊어져야 하는 연대책임 문제를 이 작품을 통해 직접 제기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기존의 나치관련 작품들과는 달리 나치에 핍박받던 희생자의 관점이 아닌 나치 수용소 감시원으로서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른 가해자 한나와, 운명적으로 얽혀 있는 전후세대 미하엘의 관점에서 사건이 기술된다.

전체 3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1부는 한나와 미하엘의 사랑이야기, 2부는 한나의 재판 과정, 3부는 재판 이후의 삶을 다루고 있다. 작품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이다. 주인공의 개인적인 사랑이야기와 나치과거에 대한 성찰이 팽팽하게 긴장을 이루면서 서로 얽혀진다. 이 때문에 1부에서는 다소 도발적으로 진행되던 사랑이야기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나치과거 문제로 확장된다. 두 주인공의 설정 자체가 전후세대미하일과 전쟁세대 한나로 대변된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이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아이가 문자 세계로 진입했는가 못했는가에 따라 상상계와 상징계로 분류했다. 상상계에 머무르는 아이는 당연히 문자 세계에 진입하지 못했기에 입말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한나가 그런 경우다. 그녀는 몸은 성숙한 여인이지만 구순기에 고착된 어린아이이다. 그렇기에 그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나치 부역에 대한, 그에 따른 죄의식이 없다. 그녀는 순수한 의미에서 無知이다.

한나는 교도소에서 미하엘이 읽어주는 테이프를 들으며 문자를 익힌다. 그것은 구순기의 고착에서 벗어나 성인의 세계로 진입했다는 상징이다. 비로소 한나는 성인이 되어 선악을 구별하게 된다. 무지에서 벗어난 한나가 선택한 것은 석방 예정일 전날 자살이었다. 한나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중대한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올바른 인지와 인식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한나는 드디어 온전한 어른이 됐고 죽음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