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조그마한 추모행사가 열린다.
올해도 엊그제 3월 26일 어김없이 행사가 열렸다.
6.25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국군의 총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하는 행사이다.
최근에는 도암면 유족회와 협력하여 인근 마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까지 함께 추모하는 면 차원의 행사로 만들어 가고 있어 그 의미가 사뭇 각별하다.
아울러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을 영원히 잊지 않고,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나아가 조국통일의 염원을 키워나가기 위한 뜻도 함께 있다.
그런데 이 행사 때마다 어김없이 기억되는 한 여인이 있다.
고 나순례 여사!
나주 어느 시골 농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입하나 덜라고 산중골짝으로 시집을 와’서 남편 따라 농사를 지으며 시부모 봉양과 남편공대를 천직으로 알던 평범한 시골 아낙이었다.
옛 노래도 곧잘 불러 지금 전남도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도장리밭노래’도 그녀의 노래가 제일 많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음력 2월 9일, 국군11사단 20연대 병력(일명 삐아루부대)은 새벽 도장마을 앞 논(일명 도포배미)에서 “살려면 모두 나오라”하여 영문도 모른 채 아침밥도 먹지 않고 모인 주민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여 마을주민 20여 명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아수라장, 그야말로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무간지옥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공포와 죽음의 현장에서 한 젊은 아낙이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 대열에서 일어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기관총이 불을 품던 언덕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학살을 지휘하던 지휘관을 붙들고 “왜 죄 없는 사람들을 다 죽이느냐”고 항변을 하고 통사정을 하였다.
그리고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사태에 무차별 살육을 자행하던 지휘관의 마음이 움직였던지 학살이 멈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0여살 먹은 어린아이 등 20여 명이 사살당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한 뒤였다.
자칫 700여명 가까이 되던 마을민 모두가 처참한 살육의 대상이 되어 함평이나 거창처럼 대규모 희생자를 낼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평범한 시골아낙의 용기 있는 행동이 더 이상의 참극을 막았던 것이다.
언젠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나온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서던 이웃나라 민주화운동 지도자의 모습을 보며 전 세계가 전율했던 기억이 있다.
그보다 더한 총알이 빗발치는 듯 쏟아지고 사람들이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살육현장에서 간난아이를 들쳐 업고 목숨을 건 항변을 했던 그녀의 행동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의로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순간적인 기지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수백 명의 목숨을 살려낸 그녀야말로 진정한 여장부요 의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희생자 추모행사에서나 겨우 한 번씩 이야기 될 뿐 그녀의 목숨을 건 용기 있는 행동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기적을 기억하기 위한 조그마한 목비 하나 아직 없다.
친일파들의 비석이 여기저기 아직도 버젓이 ‘공덕비’ ‘송덕비’로 서 있고, 시쳇말로 면장만 지내도, 향교의 무슨 회장만 지내도, 심지어 마을이장만 좀 잘해도 번듯한 ‘공덕비’ ‘송덕비’를 흔하게 세우는 세상임에도 그 수많은 목숨을 살렸던 영웅을 기리는 작은 비석 하나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전란이 있었고, 그 와중에서 침략자들에 의한 살육과 약탈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6.25 한국전쟁은 동족 간에 서로 총질을 하며 무자비한 살육을 수도 없이 자행했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부끄럽고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이다.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름 없는 영웅들과 의인들에 의해 우리의 양심과 존엄은 그나마 유지되고 지켜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들꽃처럼 평범하게 살다 갔지만 ,위기의 순간에 범접할 수 없는 용기로 수많은 목숨을 살리고 커다란 비극을 막았던, 진정한 의인 고 나순례 여사를 기억하고 그녀의 용기와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그래서 이제 지역민이 함께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과 양식 있는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 해야 할 최소한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