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 고정희.
그녀는 생전에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를 쓰거나 묵상에 잠기며 시를 통해 구원을 추구한 시인이었다.

고정희 시인은, 1991년 지리산 등반도중 뱀사골 산장 아래에서 장마에 불어난 계곡을 건너다 실족사 하였는데 그녀의 마지막 시신(屍身)을 거둔 지리산 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을 빌리면, 시신이 매우 무거워 옮기던 직원들이 모두 곤혹스러워 했다한다. 시신이 물에 불어서였는지 아니면 원래 시신은 무겁다는 說이 있다고 하지만,,,,하여간 나는 그 글을 읽을 때 그 ‘무거움의 원인’은 아마도 어이없이 떠나가야 했던  고정희 시인의 ‘애통한 영혼의 무게’ 였을 거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옛말에 ‘사람 죽어 이름을 남기고 동물 죽어 가죽 남긴다’ 했듯이 고정희시인은 죽어서 그녀의 시속에 살아있는 내면세계와 행동, 그리고 그의 시에서 분출되는 강한 의지력을 통하여 살아 있는 자들에게 진정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선물로 남겼다.

고정희(高靜熙, 1948년 ~ 1991년 6월 9일)

시인.
전남 해남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가 추천되어 문단등단, ‘목요시’동인으로 활동.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이 시대의 아벨>외 다수
1991년 지리산 등반 중 사고사.
생전에 그녀는 활발한 여성운동으로 가정법률상담소 출판 홍보 책임간사, 여성신문 주간 등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