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가사 문학의 터 담양
50세부터 54세까지의 시기가 송강에게는 정치적 좌절기였으나 문학적으로는 전성기였다. 온갖 세파에 부대끼며 시인으로서도 원숙한 경지에 들어서서 <사미인곡>, <속사미인곡>같은 가사문학의 정수와 수많은 단가(短歌)가 이때에 만들어졌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 1번지의 전남지방기념물 제1호인 송강정과 남면 지곡리 산 75번지의 식영정은 송강문학의 산실이다. 송강정은 원래 죽록정(竹綠亭)을 송강이 고치고 이름을 바꾸어 머물던 곳인데 그 옆에 <사미인곡>전문을 새긴 송강시비가 서 있다. 1955년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송강시비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몸 삼기실제 님을 쫓아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 모를 일이런가/ 나하나 젊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람 견줄데 노여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사미인곡>은 송강 자신을 한 여자로 놓고 국왕을 임으로 비유하여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고 연모하는 심정을 독백체로 읊은 작품이다. 그리하여 그리운 님 때문에 병까지 생겼으니 차라리 죽어 범나비가 되어서라도 님을 따르고 싶다며 끝을 맺는다.

한편 <속미인곡>은 두 여인을 등장시켜 대화체로 구성하여 한층 애절한 사모의 정을 그려낸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정수이다.

저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여이다/ 천삼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 다져 져문 날에 누굴 보러 가시는고/

이렇게 시작하는 <속미인곡>은 지는 달이 되어 잠시 님의 창밖에 가서 비치는 것 보다 궂은 비나 되어 님에게 구슬프게 오래도록 울어보라며 끝을 맺는다.

식영정은 별뫼 끝자락에 아름드리 노송들로 에워싸여 있으며 밑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이다. 식영정은 본래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에게 지어준 정자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이른바 ‘식영정사선’(息影亭四仙)이 어울려 술과 시와 거문고와 노래로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였다.

송강은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어 성삼문(成三問)의 옛집 뜰에 있던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평생토록 애용했다고 한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생 세간에 좋은 일 많건만은/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낮게 여겨/ 적막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이렇게 시작되는 성산별곡은 식영정과 서하당 주변 사계절의 변화하는 정취를 묘사하고, 마지막으로 뜬구름같이 변화무상한 세상에 술 마시고 거문고 뜯으니 신선이 부럽지 않노라는 뜻의 내용이다. 성산별곡은 겉보기에는 김성원의 풍류를 그린 것이나, 실은 송강 자신을 두고 읊은 것으로 풀이된다. 서하당은 김성원의 당호인 동시에 식영정 곁에 짓고 풍류를 즐기던 정자인데 지금은 자취도 찾을 길이 없다.

정여립 모반사건에 서린 기축옥사
송강 정철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입신출세를 하게 되는 데는 김윤제를 비롯 송순, 임억령 등 원효계속의 계산풍류의 종장들로부터 총예와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국은 사림파 내부의 갈등으로 동·서 붕당이 시작되던 때다. 송강은 서인쪽에 합세하여 직제학, 승지, 강원·전라·함경도 감찰사, 예조판서, 형조판서, 그리고 권력의 핵심인 대사헌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송강정 - 송강 정철(1536∼1593)이 조정에서 물러나 4년동안 조용히 지내던 정자로, 송강정이라는 이름은 정철의 호인 송강에서 비롯된 것이다. 죽록정이라고도 부르며, 1955년에 고쳐 지었다. 바로 이곳에서 <사미인곡>이 탄생되었다. 송강정 앞으로 ‘송강시비’가 보인다.

그러나 1585년 서인세력을 이끌던 율곡이 세상을 뜨자 집권당의 지위를 동인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서인의 핵심이던 송강은 동인들의 까시러운 탄핵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젊은 시절 꿈이 서린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호남의 사림계도 중앙 정계와 마찬가지로 담양·창평쪽의 서인세력과 광산·나주쪽의 동인세력으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광산·나주 세력은 곤재 정개청을 학문의 종장으로 삼고 경헌서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의 눈에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내려와 벌이던 송강의 세속적인 풍류가 좋게 보일리 없었고 송강을 포함해 그와 교분하던 사람들을 한데 싸잡아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들이댔다.

권력을 잃고 고향에 돌아와 모멸까지 받은 송강이 가만히 앉아 있을리 없었다. 4년째 송강정에 머물고 있던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터지자 송강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여 동인타도의 기치를 든 것이다.

정여립은 송강과 라이벌이자 호남의 동인세력과 교류가 깊었는데 당쟁에 염증을 느끼고 천반산 기슭 죽도에 은거하여 살았다. 이를 두고 정여립이 해도에서 군사를 양병하여 모반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를 들은 송강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궐로 들어가 임금을 위문하니 선조는 그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그해 11월 우의정으로 등용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바로 좌의정으로 승진을 한다.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송강은 정여립 모반사건의 재판장이 되어 생사여탈권의 칼을 휘둘렀다. 이 사건으로 호남 사림은 참혹하게 절단 나고 만다. 이른바 기축옥사이다. 정여립은 주살당하고 그를 따르던 대동계원 1천여명이 검거당했다. 호남 사림의 동인계는 곤재 정개청을 비롯하여 주요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귀양을 갔다.

구속된 사람이 50여명, 귀양을 간 사람이 20여명, 출세길이 막힌 금고자가 400여명 이었으니 호남 사림의 물줄기가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구원(舊怨)이 서린 집안에서는 선조들의 제삿날이면 정철에 대한 증오로 “철철철” 소리를 내며 칼도마질을 했다는 전설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송강을 품에 안아주었던 호남과 호남사람들이 바로 송강에 의해 맥이 끊어지고 만 셈이 되었으니 이를 두고 무엇이라 해야 할지. 지난 역사를 들추다 보면 그늘 속에 가려진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송강도 마찬가지다.

환벽당 - 광주호 상류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정자로, 조선시대 때 나주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때문에 송강은 이곳 사람들에게 자랑이자 큰 수치이기도 하다. 그가 일구어 낸 가사문학의 업적으로만 본다면 호남을 국문학의 聖地로 만든 큰 인물이지만 그로 인한 호남(湖南) 사람의 운명을 알고 나면 그 반대의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다.

송강 정철의 빛과 어두움
송강 정철은 당쟁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부침을 거듭한 정치적 풍운아였으나 별빛처럼 아름다운 수많은 시가를 남김으로써 국문학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위대한 문인이었다. 송강의 문학작품이 빼어나고 값진 까닭은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다듬어 빛낸 데에 있다고 볼 것이다. 그는 쉽고도 평범한 우리말을 엮어서 구슬처럼 아름다운 詩歌들을 지어냈으니 송강이야 말로 국문학사의 빛나는 등불이요 큰 존재이다.

그의 가사문학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순탄치 못한 벼슬살이를 했던데서 연유되었다.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걸작 대부분이 좌천과 유배와 은둔 시절의 걸작이기 때문이다. 타협을 싫어하는 강직한 성품에 영욕으로 얼룩진 무상한 정치가의 길을 걷긴 했지만 그는 남달리 따스한 눈빛으로 자연과 인간사를 바라며 시를 읊었다.

때로는 꽃과 나무를 가꾸고, 때로는 낚싯대와 가야금을 벗 삼기도 한 송강 정철. 선풍도골(仙風道骨)에 도도한 언변으로 한 시대를 바람처럼 풍미하고 지나간 그는 또한 평생토록 술을 사랑한 風流家客이었다. 송강의 권주가 장진주사<將進酒辭>는 4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금새라도 귓가에 들려올 듯하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꺾어 산(算)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몸 죽어지면 지게 위에 거적덮어 졸라메어 지고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 사람이 울며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