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화려한 휴가’-‘5․18민주화운동’ 남녀노소(男女老少) 모두가 올바른 역사인식을 하도록, 현재 다시 재조명 되고있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임재경 선생의 칼럼을 소개한다.

게을렀다고 해야 맞겠으나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된 영화관 단성사가 8층짜리 멀티플렉스로 개장한지 2년 반이 지난 어저께 비로소 거길 갔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기 위해서인데 민족예술인 총연합(민예총)의 특별배려로 이루어진 일종의 시사회 자리였다.

‘화려한 휴가’는 대분류로 하자면 극영화에 속하지만 이야기 줄거리는 누가 무어라하더라도 사실에 근거한 다큐에 가깝다. 5월 항쟁 당시 신문사의 밥을 먹으면서 전두환 쿠데타로 인해 온갖 풍상을 겪은 나는 그 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목격담을 수없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문자 기록과 영상기록으로 5월학살의 포악무도한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각인돼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서 인지 이 영화는 결코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서부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빛이 바래기 마련인 우리 모두의 기억을 재생시켜준 고마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빛바랜 기억 재생시켜준 영화

영화가 끝난 다음 오랫동안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여럿과 단성사 앞에서 마주쳤다. 예외 없이 그냥 헤어지기 아쉽다는 표정은 자연스럽게 소주를 곁들인 점심으로 이어졌다. 시인 민영, 문학평론가 구중서, 극작가 안종관, 국문학 교수 임형택, 민예총 회장 김용태, 소설가 이경자, 연출가 임진택, 그리고 나, 이렇게 70대 초에서 50대 중반에 걸친 ‘5월 항쟁 동시대인(同時代人)’ 여덟이 마주 앉았다.

나이가 들어서 누선(淚腺, 눈물 샘)이 탄력성을 잃은 결과겠지만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며 나는 우스개 소리 비슷하게 운을 뗐다. 연희분야의 일가를 이룬 사람임으로 당연히 영화 평가에 공정함을 지녔을 50대의 임진택 역시 눈물을 여러 번 흘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 말을 경청한다면 이 영화가 저차원의 감상주의에 호소하고 있지 않음을 백번 확인하고도 남는다.

여류 소설가 이경자는 이른바 계엄군이 총탄을 퍼부으며 전남 도청을 진입하던 날 미명, 여주인공인 간호사 이요원이 짚차 위에서 마이크를 들고 쥐죽은 듯 고요한 거리를 돌려 “광주를 잊지 말아주세요”하던 외침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 글을 쓰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 인질 문제가 궁금하여 인터넷 신문에 잠시 들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전사모’라는 단체가 영화 ‘화려한 휴가’가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카페 글을 올렸다는 보도가 나왔다(‘오마이뉴스’ 8월 7일자). 개봉 10여일만에 370만의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가 전국 곳곳에서 골고루 화제가 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단순한 지역감정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 영화를 두고 특기할 일은 감독 김지훈이 대구 출신으로 1971년생이라는 점이다. 그가 아홉 살 적 대구에서 잠자리를 잡고 놀던 시절 광주 학살이 발생했던 셈인데 초중고학교의 사회 과목 시간에 5월 항쟁의 실상을 가르쳐 주지 않은 교사들과 세상의 선배들에게 그는 몹시 분개했을 터이다. ‘화려한 영화’를 보고 아아하고 놀란 나머지 목이 메는 울분을 느낀 젊은이들이 수만 아니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서로 분단되었다가 통일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전 대통령 바이스체커는 독일 국민은 ‘책임을 자각하는 공동체’(Verantwortungsgemeinschaft)가 되어야한다고 언명한 적이 있다. 나치의 폭압과 헌정 민주주의의 파괴, 그리고 유대인의 대량 학살과 2차대전의 죄업(罪業)을 다음 세대가 올바르게 치르고 또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전 세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먼저 ‘기억을 되살릴 줄 아는 공동체’가 되어야할 입장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에 가친다는 뜻이 아닐뿐더러 열려있는 사회로 나가는 큰 길이기도 하다.


남북화해 위한 큰 영화선물 기대

‘화려한 휴가’의 제작자 유인택은 12년 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선보여 우리의 가슴을 때렸다. 그 때에 비해 노동조건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을지라도 전태일의 기억은 확실하게 이 사회에 되살아났다.

우리 앞에 닥친 사회와 겨레의 공공적 사업들을 영화인들에게만 지우는 것은 선후에 어긋난다. 하지만 영화 ‘화려한 휴가’는 기억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이번 제작-출연진의 힘이 넘칠 때 분단 극복과 남북화해를 위한 또 한 차례 큰 영화 선물을 주기 바란다.

임재경(任在慶) 선생은 언론인으로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 한국일보 논설위원, 한겨레신문 부사장,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평생을 민주언론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해 온 이 시대의 양심있는 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