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를 잘 만나야 하고, 중학교 때는 아빠를 잘 만나야 하고, 고등학교 이상은 할아버지, 즉 조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시는지?
재테크에, 부자 바람이 부는 요즘 부모들의 속 타는 심정을 자양분 삼아 만들어진 우스갯소리다. 느닷없이 “친구네 집은 50평인데 우리는 왜 30평이야?” “엄마, 나도 이번 여름방학 때 호주로 어학연수 갈래” “나는 왜 피아노만 해. 바이올린도 하면 안 돼?” 등의 질문을 쏟아내는 아이들. 나름대로 부족한 것 없이 키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녀들은 또래 친구, TV나 사회 교과서 등에서 접하는 ‘정보’를 통해 ‘상대적인 빈부 격차’를 느끼고 있다. 이를 모르고 있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한 방’ 먹는 부모들은 당황해 하며 ‘금쪽같은’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요즘 아이들이 민감하게 느끼는 ‘신’ 빈부격차,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요즘 돌잔치는 ‘돈 잔치’라 할 만큼 화려함 그 자체다. 게다가 돌잡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아기가 ‘1만 원 권’ 지폐나 ‘계산기’를 집었을 때 ‘부자 되겠네’ 하며 더 기뻐하는 부모와 하객들을 만난다. 반면 ‘연필’을 잡으면 ‘공부시키랴, 돈 많이 들겠다’로 통한다. 연필은 이제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이렇듯 우리 생활은 언젠가부터 한 아이의 출발에서부터 ‘돈’이나 ‘부자’ 등과 친숙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이 외에도 주변을 살펴보면 ‘부자 되기’를 열망하게 만드는 많은 자극들은 부지기수다.

‘신드롬’의 시작이라 할 모 CF의 광고 문구 ‘부자 되세요’. 채널을 돌릴 때마다 귀 아프게 들었던 이 말이 이제는 신년이나 명절 때마다 가장 많이 건네는 덕담으로 발전했다. 여기에 TV 드라마마다 멋진 주인공은 대부분 고급 외제차를 끄는 ‘재벌’로 나오고 오락 채널조차 부자 열풍을 부추기는 ‘재테크’ 관련 코너를 빠뜨리지 않고 챙기는 상황.
비단 언론 매체뿐만 아니라 생활 속을 들여다보면 교육비에, 아파트 대출 이자에 갈수록 늘어만 가는 생활비 걱정에 엄마, 아빠의 한숨 쉬는 모습을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엿보면서 우리 아이들은 돈 걱정 없는 ‘부자’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동경을 가지게 된 건 아닐까.
이렇게 묻는 바탕에 최근 우리 아이들이 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의사, 변호사도 아닌 ‘부자가 되고 싶다’는 대답이 서슴없이 나온단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막연히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부모들은 벌써부터 돈을 밝히는(?) 아이들의 대답에 당황스럽고, 왠지 서운한 마음까지 든다. 아주 풍족하진 못해도 남들 하는 것만큼은 해주고 있다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기대 수준은 일찌감치, 가볍게 기대치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즉 남의 것과 내 것의 ‘크고 작음’ 과 ‘많고 적음’ 그리고 ‘비싼 것과 싼 것’을 비교하는 능력을 일찍부터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 아빠는 자신이 원하면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주고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만의 ‘빈부격차 용’ 질문들을 수시로 쏟아내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평수와 차 크기에 민감한 아이들

엄마 품에 있던 아이들이 유치원, 학교, 학원 등에서 또래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시작된다. 엄마들은 ‘우리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염려하고 있는 사이 문제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불거져 나온다. 그것은 학교에서 돌아와서 또는 친구 집에서 놀다 와서 불쑥 불쑥 내뱉는 아이들의 한마디다.

주부 유은숙씨(42)는 최근 집에서 몰던 중형차 두 대 중 한 대를 팔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초등학교 1학년생 둘째 아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엄마, 우리 가난해진 거예요? 친구네 엄마는 외제차 타는데…” 하더란다. 때마침 아들은 친구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 집 외제차를 타고 파티를 하는 식당으로 이동했고 차 안에서 친구가 자랑을 했다는 것. 유씨는 그저 차 두 대가 별 효용이 없어 한 대로 줄였던 것인데 ‘가난해진 것이냐’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들에게 통장까지 꺼내 보여주며 ‘우리 집도 부자’라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부자와 가난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지는 난감했다.

빌라 상가에서 치킨가게를 하며 주말에 새벽까지 일하느라 바쁜 정아무개 씨(35)도 올 학기 초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어느 날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한 친구 집에서 놀다온 딸(초등 1학년)이 이불 속에서 울고 있었다. 붙잡고 물어보니 딸은 자신도 친구처럼 “자기 방이 갖고 싶다”며 “친구는 공주 침대도 있고 옷장엔 드레스도 많았다”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드레스가 있는 친구는 공주 역을 맡고 자신은 하녀 역을 맡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정씨는 가게 일 때문에 주말에 놀러 한 번 가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한데 아이 방마저 꾸며주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 눈물이 절로 났다고 했다. 이어 정씨는 “문제는 고학년으로 갈수록 아파트와 빌라에 사는 아이들이 따로 어울리는 것”이라며 “전세라도 아파트에 살아야하는 게 아닐까 싶다”며 속내를 밝혔다.

고학년 될수록 임시방편 구슬리기 안 통해

학년이 올라가고 돈에 대한 개념이 구체화될수록 아이들의 요구는 점점 구체화된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예민한 시기라 집안 환경이나 부모의 경제력에도 더욱 민감해져 임시방편으로 구슬리거나 야단치면 오히려 역효과 나는 경우가 더 많다.

요즘엔 방학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다는 엄마도 적지 않다. 요즘은 방학 때 호주나 캐나다 등으로 단기간 어학연수 다녀오는 것이 붐이기 때문. 이아무개 씨(40)는 방학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을 때 초등학교 6학년생인 아들이 불쑥 “나도 이번 여름방학 때 호주로 어학연수 가고 싶어요.”라고 말해 적잖이 당황했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예약했다며 자기도 보내달라고 한 것. 웬만한 프로그램은 오백만 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들이 보내달라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
“엄마가 알아보니까 거기 갔다 와도 영어로 인사 한마디 못한다더라고 둘러댔죠. 여기서 학원 다니는 게 훨씬 낫다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타일러도 다 자라서 그런지 아들은 ‘그럼 어학연수 대신 온 가족이 해외여행이라도 가자’며 친구들이 해외여행 다녀온 얘기를 할 때 마다 소외감을 느낀다고 털어놓더라고요.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듯 아프더군요.”

‘이런 것도 못 사주고’ 눈물 짖는 엄마 vs 당당하게 맞서는 엄마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를 잘 만나야 하고, 중학교 때는 아빠를 잘 만나야 하고, 고등학교 이상은 할아버지, 즉 조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의 세심한 뒷바라지가 중요하고, 본격적으로 입시 경쟁에 뛰어드는 중학교 때부터는 개인 과외를 시켜줄려면 아빠 연봉이 높아야 하고, 대학 입학과 어학연수, 해외 유학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고등학교 이상부터는 웬만한 중산층 부모의 경제 사정을 훌쩍 넘어서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재산이 뒷받침 돼주어야 다는 것이 속뜻이다.

주부 이아무개 씨 역시 “자식한테만은 가장 멋진 아빠, 엄마가 되고 싶잖아요. 적어도 돈 때문에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가 커갈수록 한계가 있네요”라며 씁쓸해 했다.
하지만 이럴 때 방어를 넘어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고 외치는 엄마도 있다. ‘이런 것도 못 사주고’ 하는 마음에 아이 요구에 끌려가다보면 나중에는 더 감당하기 힘들 수 있다는 이유다. 이재희 씨(40)의 이야기다.
“하루는 아들이 유명 브랜드 운동화가 신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반 친구들이 다 그 신발을 신는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엄마가 골라준 신발이 불편했냐고, 네가 사고 싶은 신발이 편하다는 것을 엄마한테 설명하면 사주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아무 말 못하더라고요.”

아이 마음부터 헤아려주고, 가계부 함께 보며 집안 형편 솔직하게

어느 부모가 자녀들이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다 챙겨주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모든 부모가 부자일 수 없고, 전지전능할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상대적인 빈부격차를 겪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한국아동가족상담센타의 이숙 소장은 “부모 자신이 경제적인 것이 절대적이지 않도록 정신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한창 멋 부리기 좋아하고 자존심이 강해지는 청소년 시기이니만큼 비싼 브랜드를 고집할 때도 ‘분수에 맞지 않다’고 면박을 주기 보다는 올바른 경제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3만원 하는 신발을 잘 신다가 갑자기 친구 따라 20만 원이나 하는 신발을 사달라’고 조를 경우 “이럴 때 역시 아이 마음을 먼저 헤아려 친구 신발이 멋져 보였구나. 그럼 지금 당장 20만원을 준다면 그 신발을 살 거니? 아니면 ‘20만원으로 평소 신던 운동화를 사고 남은 17만원으로 다른 것도 함께 사겠니?” 하고 20만원으로 할 수 있는 리스트를 작성해 보게 해보라는 것. 그러면 친구를 따라 충동구매를 하려던 생각에서 계획성 있게 쓸 수 있도록 한 번 더 숙고하는 자세를 키워줄 수 있고, ‘17만원’에 대해서도 그냥 한 번에 주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 기간을 정해 가사노동이나 심부름, 학업 등으로 ‘17만원을 버는 방법’을 실천하게 하는 것도 좋은 경제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국민은행연구소의 박철 연구위원의 조언도 비슷하다.
“요즘 아이들은 집안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마치 태어날 때 부모에게 돈을 맡겨놓은 것처럼 너무도 당당히 용돈을 요구하고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아이들도 집안 형편을 알아야 비로소 가족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공유할 수 있어요. 아이들에게 가정의 어려움과 생활을 어떻게 꾸려 나가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금융교육이 됩니다.”
또한 많은 부모들이 집안 형편을 말해주는 것에 인색한 이유는 ‘그런 얘기를 뭐 하러 하나’ ‘얘기를 해준들 이해나 할까’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식으로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란다. 박 연구위원은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부모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집안 형편과 관련해 자녀들이 질문을 하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사실대로 알려주는 것이 좋다’고 설명한다.

그 방법의 하나가 가계부를 앞에 놓고 설명해주는 것. 지출 내역별로 봉투를 준비해서 가정의 한 달 수입을 현금으로 각각의 봉투에 나눠서 넣은 것을 보여주거나 집안에 넘쳐 나는 영수증, 고지서 등을 자녀와 함께 정리해 보는 것도 가계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박 연구위원은 “집안의 수입과 지출, 경제 형편을 아이들과 함께 얘기하다 보면 아이들은 부모가 무한정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며, 계획적 지출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을 줄 아는 아이, 나아가 정말 필요한 것이 생겼을 때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고 보면 주눅 들거나 상처를 입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돈의 의미를 감추거나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는 것이 ‘돈’이라는 것을 부모들이 먼저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